머리말을 대신하여
여기에 실린 글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기쁜 일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더 많아 보이고, 신나고 즐거운 일보다 근심과 걱정이 앞서는 것 같은 현실 한가운데서 그래도 내 삶의 의지처가 되고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아니던가.
내 삶을 에워싸고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에서 가끔 한걸음 물러나, 그것들을 응시하고 반추해 보자. 내가 늘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가끔이라도 속도를 좀 늦추고 내 주변에 눈길도 한 번 더 주고, 머리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그리고 나의 일상과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고, 나의 통념 - 관습적인 사고방식과 그 틀 - 을 훨씬 뛰어넘어 내가 좀 더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자.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가운데서)
이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더 나은 곳"을 갈망하는 이 세상의 나그네요, "하늘 본향"을 찾아 나선 순례자다. 그런데 우리 순례의 여정에 기쁨과 분노, 슬픔과 두려움, 사랑과 미움, 그리고 각종 욕망이 동반되고 삶의 현장에서 그러한 감정과 욕망이 수시로 출몰하여 너와 나의 삶을 채운다.
흔히 사람을 일러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면서도 또한 감정의 동물이라고도 한다. 이성 못지않게 그러한 감정적 요인들이 실제로 너와 나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이성과 조화를 이룰 때 마음이 평정되어 평화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할 때 마음의 평정이 깨져서 불안해지거나 혼란에 직면하고 번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 자신의 마음을 담백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때와 상황에 따라 수시로 출몰하여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나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끊임없이 행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직면하는 사건과 내가 보고 듣는 각종 매체를 통하여, 나의 일상이 바로 그러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대개 내가 자신을 다스린다거나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 실제로 다스린다고 하는 그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감정 다발과 욕망의 사슬에 얽매인 마음이다.
삶이 다하는 그날 이 세상에서 순례의 여정이 다하는 그때까지, 나는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그것들과 함께 내 삶의 모자이크를 만들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내가 어떠한 눈길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어떠한 자세로 그것들을 대면하고 받아들이며, 어떻게 그것들을 다독거리고 다스리며 사는가?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자비롭고 영원한 하느님 곧 당신의 자비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 가운데 오신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보이는 얼굴인 주님(육화하신 하느님)을 믿고 우러르며 사는 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영원한 그분의 눈길로 매사를 바라보고 의식하면서, 그분을 닮아 가는 여정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 실린 글 가운데 1부에 실린 것들은 대부분 그 주제와 소재를 주로 성경에서 취하였고, 그것을 중심으로 되새김질한 비교적 짧은 글이다. 그리고 2부에는 1부에 비하여 호흡이 좀 더 긴 글을 실었다.
아무쪼록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늘 안정되게 숨 쉬고 움직이며, 함께 하는 이들과 더불어 울어야 할 때 함께 울고 웃어야 할 때 함께 웃는 가운데, 그분과 더불어 자족하고 자재하여 내적인 자유를 누리는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복되고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