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2%의 다른 길을 걸은 저자, 약사 심명희
노숙인처럼 너무도 가진 게 없어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 요셉의원을 세운 고 선우경식 원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도왔던 약사 심명희 씨가 요셉의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냈다. 요셉의원 뿐 아니라 사랑샘 쉼터(고시촌 고시생들의 쉼터), 차오름 공부방(면목동에 있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등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모았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가난과 외로움에 허덕이는 이웃들을 돌보며 봉사해온 약사 심명희 씨의 삶을 보면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아무래도 약사라면 편안한 삶을 택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녀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다수가 택하지 않는, 외로운 2퍼센트의 길 위에서 보낸 것일까?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이웃들과 더불어
심명희 씨가 봉사를 하며 만나온 사람들의 삶은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난하고 절망스럽다. 용돈을 받기 위해 자신을 수도자라고 속이는 노숙인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속아준 고 선우경식 원장님과 몇 년이 지나 번듯한 직장인이 되어 원장님을 찾아온 과거의 노숙인, 증권 회사 취업 조건으로 증권 선물 계좌를 개설했다가 채무불이행자의 나락에 빠졌지만 서로 격려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과일가게 남매, 식판을 훔쳐간 노숙인에게 공짜밥을 먹이며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한 백반집 사장님, 고아 시설을 전전하다 신체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구두 수선집 인수 씨 부부 등.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 심명희 씨의 인간적인 시선, 절망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는 이웃들의 모습은 우리의 얼굴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자비
올해 2016년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 희년이다.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며 발표한 칙서의 제목은 「자비의 얼굴」. 무자비한 이 땅에서 자비로움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야’ 한다고 칙서는 말한다. 그렇다면 자비의 얼굴은 곧 아버지의 얼굴이자 우리의 얼굴이 된다. 요셉의원 고 선우경식 원장의 얼굴, 그를 도운 약사 심명희 씨의 얼굴 역시 우리의 얼굴 중 하나다.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타인의 삶 속에 희망을 심어주고자 하는 마음, 그것을 세상에서는 ‘자비’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자비를 실천할 수 없을까? 그 어떤 세상의 문턱도 자비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히 만드는 자비의 힘을 이웃들의 『2% 다른 길』에서 발견하길 바라본다.
‘밥, 방한 점퍼, 인슐린’을 처방한 의사
고 선우경식 원장은 1983년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신림동 철거민촌에서 의료봉사를 계기로 노숙자와 극빈층의 치료에 매진했다. 1987년 8월, 영등포 역 건너편 쪽방촌(신림1동 동사무소 자리)에 무료 진료소인 요셉의원을 설립해 21년 동안 노숙자, 외국인 근로자 등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고 선우경식 원장은 영세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인생을 헌신하다 2006년 위암 판정을 받았고 투병 중에도 환자들을 진료하다 2008년 4월 뇌출혈로 쓰러져, 3일 후 타계하였다.
요셉의원은 단순한 ‘무료병원’이 아니었다. 요셉의원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가족이 없거나 거처가 일정치 않아 치료를 받고도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들의 재활을 돕기 위해 고 선우경식 원장은 재활센터를 세웠고 물레실습장과 중국음식점을 열어 영세민과 노숙자들이 다시 살아갈 방도를 찾아 주었다.
고 선우경식 원장의 처방전에는 약만 적혀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밥, 방한 점퍼, 인슐린’. 그의 처방전은 약보다 밥이 먼저였다. 그는 요셉의원에 밥을 굶고 오는 사람이 많아서 “배고픈 환자에겐 약보다 밥을 주는 게 급하다"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식사를 제공했고 봉사자들을 통해 이발과 목욕도 시켜주었다. 요셉의원은 병원이기보단 가난한 이들 그리고 우리 마음 한 편에 그리움으로 사무쳐 있었을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었다.
올해로 고 선우경식 원장의 8주기가 돌아온다. 무관심과 비참함에 빠진 세상에서 자비를 외치는,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이 세상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을 그의 얼굴이 궁금하다.
더 없이 낮아지고 아낌없이 비워내던 삶,
퍼주고 또 퍼주어도 샘솟던 사랑으로 몸 바쳐 쓰러지실까봐
이제 그만 쉬시라고 손잡아 불러올리신 크신 뜻이 있으셨나 봅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 고 선우경식 원장 장례미사 때 낭독된 조사 중에서(시인 조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