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닦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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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수령지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로 27 (가톨릭출판사)
브랜드
가톨릭출판사
저자
서동찬 신부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출간일
2009-06-23
판형/면수
154*224/반양장/292면
예상출고일
1
덕을 닦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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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하루 같이
솔향기 풍기면서
그 자리 지키는 소나무

비바람 저리 보내고
스쳐가는 길손 어루만지며
그 뒷모습 담아두었다가
 
가는 세월 마주하는
길손들의 칭송 받으며
천년의 세월 자랑한다

천 년의 세월을 머금은 듯, 늘 푸르게 서 있는 ‘천년송’에 대한 이야기다. 항상 그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다. 비바람, 눈보라, 흙먼지가 날아와도 그렇게 서 있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우직하게 서 있다. 충절상청(忠節常靑)이라 했던가. 늘 푸른 모습으로 절개를 지키고 있다.
인생은 백 년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인생의 절반은 고통과 괴로움인 것 같다. 그러기에 더더욱 행복을 갈망하며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가 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까지 갈망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가오는 죽음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은 계속된다. 어느 누가 죽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을 책임져 줄 그 누가 없을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대상을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천주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은 영원불변하는 분이시며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분이시다. 더구나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신다. 죽음을 극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일을 완성하셨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극복한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진리이다.
구원의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전해진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구원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져 있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 담겨져 있다. 성경은 하느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바로 영성(靈性)이다.
이 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점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인도한다. 특히 하느님의 덕을 닦으며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한다. 제1부에서는 영성과 신앙적인 덕(德)에 대하여 정리하였고, 제2부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덕을 제시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회의 전통적인 덕목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실천하는 향주삼덕과 수도(修道)를 위한 청빈, 정결, 순종의 복음삼덕이다. 여기에 겸손, 진실, 정의를 증거삼덕이라 칭하여 추가하였다. 증거삼덕은 선교를 지향하는 덕목이다. 제3부에서는 성경을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사목적인 견지에서 성경을 함께 읽고 나눌 수 있는 영성적 모임 방법을 제시하였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먼저 숙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다가와야 한다. 말씀이 바람처럼 스쳐갈 수도 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잡아야 한다.

무지개가 햇살 받으며
구름에서 호수로 내려앉는데

바람이 무지개 타고
하늘의 기쁜 소식 전해주네

끝으로 이 책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책을 펴내는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영성교육을 담당했던 경험을 반영하여 원문을 정독하고 고귀한 의견을 나누어주신 박우성 신부님과 교정을 맡아주신 김상문 신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09. 4. 22
양양 인구에서 안식년을 지내며,
서 동 찬

본문중에서

제1부

영성의 실재

 

제1장 영성적 인간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태중의 임신을 축하하고 탄생을 축하한다. 또 백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았음을 축하하여 백일잔치를 벌이고, 일 년 동안 건강하게 살았음을 기념하여 돌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매년 탄생일을 기억하며 생일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모두가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소중한 의식행위이다. 생명이 살아있음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행위들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반영한다.
귀한 인간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존중받는 삶을 살아가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 기쁨과 행복, 고통과 슬픔, 불행과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왔음에 대하여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생애를 살아오신 어르신들께 회갑, 칠순, 팔순 등으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을 준비한다는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죽은 인간의 삶을 기억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귀하게 태어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또 ‘어떻게 죽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 질문 속에 삶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잘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잘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으로서 그 귀함을 잃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는 것이다. 귀하게 살지 못하면서 천수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귀하게 살기는 하였지만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아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잘 살지 못하면서 잘 죽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간은 한 생명의 죽음 앞에 동정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사와 추모의 행렬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잘 살았는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잘 살고 잘 죽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은 신적(神的)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는 신적이며 영적(靈的)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 생명의 존엄함

인간은 근원적으로 신(神)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신적 생명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간단히 규정지을 수 없다. 즉 인간의 삶에는 일정한 공식이 없다. 어떠한 틀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여기에 고유한 인간 삶의 가치와 존엄함이 있다.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개개인이 각자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외적으로 똑같거나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내적인 삶의 내용은 고유한 것이다. 즉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네가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고, 또 내가 너와 같지 않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위해서 살아갈 때 삶의 가치와 보람이 있고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거나 너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이기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삶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자신의 주관성만 고집하는 것이나 자신의 주관성을 상실한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엄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존엄한 인간은 선(善)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악(惡)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선과 악 이전의 실체(實體)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이다. 선도 악도 존엄한 생명을 지닌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즉 인간이 선도 행할 수 있고 또 악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만 행하도록 규정된 인간도, 악만 행하도록 규정된 인간도 없다. 오히려 선과 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현실이 인간 삶의 처지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삶의 처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는 대명제가 제시된다. 더 나아가서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라.’ 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삶의 중요한 교훈이 된다.
인간이 악을 행하였다고 생명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품위가 상실될 뿐이다. 악을 행한 인간이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인간의 품위를 회복하게 된다. 악행에 대한 내용이 한 인간의 생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선과 악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 개방되어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함을 더해 준다. 그렇다면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성장시키는 노력이 존엄한 삶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무한한 가능성은 긍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작용한다. 부정적인 요인이 인간의 나약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긍정과 부정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부정적인 악이 작용할 때 죄(罪)를 범하게 된다. 악이 인간관계 안에서 이기적이며 비인간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선이 작용할 때 덕(德)을 쌓게 된다. 선이 인간관계 안에서 자비와 사랑으로 작용한 것이다. 인간관계 안에서 덕이 베풀어질 때 상생(相生)을 위한 미덕(美德)이 된다. 따라서 덕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의 삶이 긍정과 부정을 넘나든다면, 덕스러움과 죄스러움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덕스러움을 죄로 무색하게 할 수 있고, 죄스러움을 덕으로 보완할 수도 있다. 죄와 덕은 인간의 품위를 실추시키거나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가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을 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삶의 내용과 결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생명은 그 모든 것 이전에 인간 삶의 근원이며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선과 악, 덕과 죄, 삶과 죽음 등은 생명을 근간으로 펼쳐지는 인간 삶의 내용이자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존엄한 인간은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터득해야 한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덕과 죄 등은 인간의 삶 속에 교차하여 반복적으로 드러나지만, 생명은 현실적으로 단 한번 주어졌을 뿐이다. 죽음이 생명을 담보로 잡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유일회적인 생명의 소중함이 더욱 부각된다.
이토록 소중한 생명이 ‘죽음’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한 인간의 생명이 파멸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약한 인간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욕망은 무한한 능력자내지는 절대자를 갈망한다. 신적 존재를 추구하며 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 소중한 생명을 영원토록 펼치고자 한다.


2. 인간의 한계성과 영원성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절대적 존재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완성시켜 행복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며 도움을 청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인간이 의탁하는 절대적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삶의 내용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 삶의 내용은 어떠한가? 잘 살아야 하지만 어렵고 힘들기만 한 현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고 싶지만 물질적으로 쪼들리는 현실, 주어진 일을 성공하고 싶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직면한다. 또한 서로 화목하고 싶지만 불화의 요인은 없어지지 않으며, 행복하고자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감수해야 한다. 마음을 비워 초연하고 싶지만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 없으며, 자유롭고 싶지만 여러 가지로 제약받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힘이 없는 상태에서 억울하게 억압당하기도 한다. 인간은 이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은 잘못된 삶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찾는다. 하느님께서 그 모든 어려움과 억울함을 해결해 주시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욕망이 지나칠 때에는 자신만을 위한 하느님이시기를 바라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앞길을 지켜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을 원한다. 또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물리쳐주시는 하느님, 나를 반대하는 자들을 척결해주시는 하느님,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을 원한다. 그러면서 ‘아이고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하고 부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만의 하느님으로 존재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너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뜻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어떠한 분으로 이해해야 하겠는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분이시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인간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존중하며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나약한 인간 삶의 내용에 급급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덕행 이전에 생명을 보시고, 인간의 악행 이전에 생명을 보신다. 덕행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악행을 고쳐 생명이 견고해지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신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랑받아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1요한 4,7-8)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도, 사랑을 하기만 하는 것도 하느님을 온전히 알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방법이며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방법이다.(1요한 4,17-18)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삶의 영원성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진다. 인간이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곧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현실적인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죽음도 창조질서인 동시에 인간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온전히 순응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현실적인 죽음을 극복해주시는 나만의 하느님일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순적인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한계성을 영원성으로 바꾸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여기에 신적 능력이 작용해야 한다.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어야 한다. 결국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죽음을 극복해 주셨다. 죽음을 파멸로 남겨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제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썩을 살과 피를 없애버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의례가 되었다. 즉 죽음을 통하여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하는 것이다.(1코린 15,50-54)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영원성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능력을 받기 위한 인간의 역할이 요구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영원성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인간은 영원한 삶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며 서로 사랑해야 하는 소명(召命)을 받았다. 이 소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인간의 영원성에 대한 갈망은 하느님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특히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표상되는 하느님의 완전성에 주목한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어려운 삶의 처지를 보완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완전해지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바람을 거부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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