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는 이천년간의 교회 전통 안에서 길이신 예수님(요한 14,6 참조)을 따르고자 하는 원의에 대한 고유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분의 겸손한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모습이자 그분의 뒤를 따라 실제적으로 순례자로서의 여정을 걷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까지 실천해야 할, 결코 끝나지 않는 순명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그분을 향한 인격적인 원의의 표현이자 보다 깊이 있는 신앙 체험을 하기 위한 여정을 의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순례를 하는 것은 걷는다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우리 삶의 모범이 되시는 ‘순례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적, 외적으로 다시 재현해 사는 것을 뜻한다.
사실, 순례는 주님께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셨던 것들을 우리의 삶 안에 동화시키는 가운데 다른 신앙인들과 더불어서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히브 3,1)하도록 인도하는 프로그램에 따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품고 있는 신앙을 떠받쳐주는 보다 깊은 이유들을 다시 발견해서 새롭게 삶의 방향을 설정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보다 굳건하게 해준다. 우리가 순례를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이런 분명한 지향은 독특한 장소들 안에서 그분의 말씀과 삶을 새롭게 느끼고 체험하기 위한 구체적인 설명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순례자는 순례 안에서 주님을 향해 눈길을 모으는 가운데 그분과 함께 걸으면서 하느님의 계시가 시간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 장소들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기를 원해야 한다. 이러한 순례가 지향하는 방향은 천상 성지로서, 순례를 통해서 방문하게 되는 다양한 성지들은 이 천상 성지를 미리 앞당겨서 체험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순례는 영적인 극기를 강조하는 가운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아 내기 위한 다양한 모습들을 제시해주며 여정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종착지 자체로 인해 이미 순례는 신앙고백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뜻을 잃지 않도록”(1고린 1,17), 이 십자가 사건이 드러내는 구원적인 전망 안에서 순례에 참여하는 각 개별 신자들을 회심으로 초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1고린 1,18)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인도해준다. 그러기에 순례는 독특한 신앙의 수업이자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쇄신하도록 인도해주는 장(場)이다.
따라서 만일 순례가 궁극적인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여정과 긴밀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는 순례가 갖는 깊은 의미를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 탓이다. 또한 순례자가 순례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 본래 순례 여정 자체가 지향하는 구원적인 목적과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순례자가 순례 안에서 바라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순례와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기저에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당신 안에서 참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이 있으며 또한 그들은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아야”(마태 10,39; 16,25) 한다는 가르침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신자는 이러한 자세를 갖고 순례 여정이 지향하는 목적을 향해 눈길을 모으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드러나는 복음이 전해주는 헤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을 요약하는 모습으로서 순례자는 순례를 통해서 보다 깊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례 체험은 일상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새로운 모습을 띠면서 확장된다. 하느님의 계시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와 시간 안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복음의 선포는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께서 하신 수많은 기적과 탁월한 가르침을 통해 인간 역사 안에 쇄도해 들어온 하느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순례를 통해서 겪게 되는 이러한 계시에 대한 새로운 체험은 순례자를 회심으로 초대하며, 나아가 그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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