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 2021-08-28 | 상품코드 | 124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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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148*217mm | 상품 무게 | 560.00g |
ISBN | 9788932117850 |
본문 중에서
이렇듯 기술과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우리는 오히려 불행과 좌절과 근심에 싸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최근 사회에 홍수처럼 넘치는 ‘행복’과 ‘힐링’이라는 용어에서도 드러납니다. 힐링 콘서트를 비롯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이 많이 생겼지만,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힐링을 많이 이야기하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행복과 힐링을 추구하는 사회에 진정한 행복을 알려 줄 인물은 없을까요? 현대인들이 찾고자 하는 진정한 행복과 삶의 지혜를 알려 줄 사상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년)입니다.
— 25-26p ‘제1강 왜 지금 ’아우구스티누스’인가?‘ 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찾는 방법으로 ‘기억’을 되돌아보라고 충고합니다.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기억 상실증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기억의 파편들을 모읍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려면 나의 과거를 제대로, 그리고 올바로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발견하려면 자신이 걸어온 과거를 되돌아보는 작업을 해 보았으면 합니다.
— 79p ‘제3강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도대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이렇게 복잡한 설명에 감동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마니교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악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이 또한 창조주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이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마니교에서 제기한 의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핍을 통해 하느님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악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선하고 완벽하게 만드셨는데, 악이 하느님과 관계없이 결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여러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빛을 가림으로써 생겨나지요. 이처럼 악도 하느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선하게 만들어진 것들이 무언가의 방해를 받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차단되어 결핍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 127p ‘제5강 하느님은 왜 ‘악’을 방치하는가?’ 중에서
문제는 여기서 생겨납니다. 악행과 잘못이 시작될 때는 ‘자유 의지에 의한 동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유 의지가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잘못 설계한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근본적으로 자유 의지가 있었고, 이를 이용해서 거부할 수 있었음에도 유혹에 동의하고 악에 빠졌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모든 인간의 원형에 해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많은 경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로 선택하여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 160p ‘제7강 ‘자유 의지’는 하느님의 ‘면벌부’인가?’ 중에서
만일에 그 대상이 이렇게 변심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확확 바뀌어 버리는 것이라면 과연 이러한 대상을 사랑하고 매달리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질문 중 하나였습니다. 또 다른 두려움은 변심하는 친구와는 달리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그 자체로 굉장히 좋고 소중한 무언가를 누군가가 와서 빼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겼을 때의 고통은 좋아하는 선배를 잃은 여학생의 슬픔처럼 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 자체가 영속적이어야 하고, 다른 이가 빼앗을 수 없도록 우리와 필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 201p ‘제9강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나치게 죽음만 생각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첫 번째 죽음인 육체의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영혼이 순례의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면, 육체의 죽음은 그 과도기에 일어난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것은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무서워하지도 공포를 느끼지도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다음에 이어지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숙고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라고 충고합니다.
— 250p ‘제11강 죽음, 그 이후의 세상’ 중에서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는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이 풍부하게 먹고살 만큼의 자연 재물을 주셨음에도 몇몇 사람들이 이것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참조)에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를 굶주려 죽도록 놔둔다면, 이것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먹고 살고 공정하게 배분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290p ‘제13강 정의와 평화, 지상에서 가능한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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