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엔의 힐데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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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엔의 힐데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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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수령지 :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로 27 (가톨릭출판사)
브랜드
으뜸사랑
저자
루치아 탄크레디
역자
임원지 수녀
출판사
으뜸사랑
출간일
2014-10-13
판형/면수
150*210/반양장/308면
예상출고일
1일
서문
 
팔라티노 백작 좀머쉔베르크 프리드리히의 딸, 간델스하임의 수녀원장인 나 아델라이디스는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총애하는 딸들에게 내가 비망록으로 기록한 이 두루마리를 넘깁니다. 부디 라자로의 붕대를 풀듯 조심히 펼쳐 정리하여, 해가 짧아져 등불 켜는 시간이 길어질 때 읽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이를 우리가 늘 하던 것처럼 라틴어로 썼습니다. 나 아델라이디스는 간델스하임에 명예가 되지 않는다고들 하였는데, 실제로 이곳의 모든 전임 원장들은 저술을 했습니다. 게르베르가와 대大로스비타가 그러하였으니, 그들은 엔니우스 혹은 리비우스처럼 우수한 시편을 오토 제국에 바쳤습니다.
나도 젊은 날에 백합 같은 곱슬곱슬한 언어로 시편을 시도했었지만, 그 언어에서 나는 객客일 뿐이었습니다. 떠돌이 나그네의 어설픈 사투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 이제 늙었으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매일 눈이 흐려집니다. 노년기가 눈 내리듯 몸을 휘감을 때, 모든 말이 침묵에서 올라와 아름다워집니다. 침묵에서 올라오는 말들은 겉보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조용히 움직입니다. 천천히 홍수가 됩니다.
아델라이디스, 이 단어는 수정 같은 소리를 냅니다. 무겁지 않은 가벼운 이름입니다. 내 이야기 역시 이러했으면 합니다. 알기 쉽고 어머니의 이야기 같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딸들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보물인 이 두루마리, 다마스코 천으로 감싸 봉인한 부드러운 양피지 문서는 내 어머니의 자서전입니다. 마지막 숨이 남아 계시던 그 순간까지 내게 구술하신 것입니다. 
내 육친의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겨우 젖을 떼었을 때, 류트가르디스 폰 슈타데 나의 그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와 이혼한 후, 덴마크 왕 엔리크의 왕비로 가셨습니다. 나는 두고두고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분 얼굴이 내가 잠자리에서 가슴에 안고 있던 그 차가운 세공품의 모습처럼 섬세하고 우아했는지, 그분의 눈이 어두운 잠 속에서 나를 살피던 올빼미같이 위엄에 찼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의 어머니란 루페르츠베르크의 수녀원장인 힐데가르트, 그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날 때부터 수녀원장으로 결정되어, 그분께 맡겨져 교육받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께 나를 데려오던 날까지 나는 천진하고 우둔하고 허약한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분은 밤에 잠옷을 입혀 주시면서, 내 팔다리가 누룩 없는 빵처럼 힘이 없다며 애처로워하셨습니다. 슬퍼서 몸을 떠는 내 곁에서 밤을 새우시며, 그분은 떨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둠을 사랑하기를 마치 빛의 다른 쪽 얼굴을 바라보듯 하라고, 달이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보석 같은 얼굴이 어둠도 지니고 있다고, 그런 채로 우리를 보살피는 저 달은 언제나 이성理性 있는 별이라고, 달이 없었다면 우리는 눈먼 어린 고양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내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고통도 샘에서 솟아나듯 그렇게 툭툭 솟아 나와 몸 구석구석 실핏줄 안으로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섬세한 손길로 고통을 부드럽게 만들어 매만져 준다는 것입니다. 살도 그 이유를 알고 있고, 영혼도 그러합니다.
힐데가르트가 즐겨 쓰시던 말이 있으니 삶의 본질 자체, 곧 ‘푸르름viridita’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디나 푸르름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은 늙지 않습니다. 
그분 역시 늙지 않으셨습니다. 82세에 이르러서도 의지대로 몸이 따라 주었는데, 당신 몸에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며 말씀하시기를, ‘몸은 매우 소중한 투니카이니 처음 받은 그대로 어느 날엔가 되돌려 드려야 해서 흠도 티도 없게 보살펴야 한다’ 하셨습니다.
그분의 몸에서는 그분의 영혼이 반짝였으니, 눈부신 아침 태양과도 같았습니다. 태양이셨던 그분 곁에서, 나는 쌍촛대 위에 높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가장 큰 탈렌트는 행복이었습니다. 검은색, 고행자의 거친 참회복, 편태 등을 싫어하셨으니, 교만에서 나오는 부질없는 허영이라 하셨고, 음욕의 가장 치밀하고 흡족한 자기도취라 하셨습니다. 오히려 초록 혹은 흰색 투니카를 좋아하셨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셨으며, 우리가 보석과 장미로 몸단장하기를 원하시면서, 젊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책에 담긴 꿀을 사랑하는 일에 잘못이 없다 하시고, 우리를 위해 천사들의 숭고한 음악을 작곡하셨으며, 참된 선善 하느님께 우리 음성과 몸을 교육하고자 하셨습니다. 험담 앞에서도 그분은 끄떡없이 버티셨는데, 당신에게는 건초 같은 긴 머리를 늘어트린 무당이라 하거나 우리에게는 고전 시 주석자들의 썩어 빠진 책으로 교육되어 살로메처럼 춤추는 시녀라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저 너머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잠시 후면 거친 장갑을 내보일 그런 어떤 여성들의 얄팍한 꾀에 관대하지 않으셨고, 명쾌하고 당당하여 모든 날카로운 발톱 앞에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악이 양잿물처럼 그분 위로 쏟아지면, 이는 오히려 그분을 씻어 내어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행복의 학교가 고통의 학교보다 백 배 더 효과가 크다 하셨습니다. 그분이 힐데가르트, 나의 어머니, 나의 자매셨습니다.

내가 루페르츠베르크에서 힐데가르트와 함께 살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간델스하임의 수녀원장이 연로하시어 돌아가시니 나에게 그 자리를 이어받으라는 것인데, 이는 내게 벌써 예정된 자리였습니다. 그날 내 이름 좀머쉔베르크 아델라이디스는 벽옥보다 더 단단한 얼음 수정 같았습니다. 긴 겨울을 견디느라 힘이 빠진 노루처럼, 나는 피가 흐르는 앞다리로 그 얼음 수정을 할퀴어 댔습니다. 
그날까지 오랫동안 나는 그 이름을 잊고 살았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이를 녹여서 걸러 내셨으니 이제 그 이름이 제 권리를 주장하며 문을 나선 것이고, 나는 이를 원하지 않아, 문은 청동 이음새에서 뻐걱거렸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간델스하임의 수녀원장은 반드시 제국의 가장 순결한 혈통에서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사슬에서 떨어진 고리에 불과한 줄 몰랐던 것입니다. 
간델스하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열에 시달려 창백했습니다. 수녀원에서는 실망했습니다. 아마도 체격 좋은 우뚝한 탑 같기를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오히려 남자 같았으면 그들에게 좋았을 것이니, 제국의 인장을 지녔다 해도 봉건 영주의 탐욕에는 별 위력이 없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예로니모 성인도 이런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여성이 그 여성 본질을 외면하고 남성 정신을 취하면 전나무가 꿀을 흘리는 것과 같고, 쐐기풀이 장미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한 것입니다. 
나는 까칠하고 쓸모없는 쐐기풀인 양, 열을 다스리러 방에 들어가 박혔습니다. 겨울은 낮마저 길고 긴 밤과 같았고, 열은 녹아 흐르는 초처럼 나를 소모시키고 있었습니다. 가끔 아득히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짐승 소리인지 숲의 신음인지, 수녀원 근처 숲쪽에서 들려왔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분의 환시에서 뿌리들이 용트림하고, 땅속의 씨앗들이 발아하는 것을 느낀다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역시 칼집 속에 잠든 해방되지 않은 씨앗 같은 존재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나는 간델스하임의 작은 침대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시간을 모래알처럼 흘려보내고 있다가, 드디어 아버지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저는 아직 수녀원장직에 걸맞게 준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에게는 “어머니, 저는 꿀이 흐르는 전나무가 아닙니다.”라고 썼습니다.
마침내 내게 시간의 여유가 허락되고, 나는 간델스하임의 수녀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습니다. 길을 나서니 벌써 가슴은 트이고 있었습니다. 빙엔은 내게 금장식을 두른 시온과 같았습니다. 라인 강이 시냇물보다 조금 큰 나에 강과 만나는 곳, 그곳은 터키석 지하 수맥이 지하 창고를 두드리는 곳이었습니다. 
루페르츠베르크의 바윗길을 올라가는데, 말들은 하얀 숨을 내뿜으며 헐떡거렸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녀원 담 밖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 앞에 다가가 엎드리며 그의 무릎을 감싸 안고 울었습니다. 그분 옷은 전에 없이 부드러운 아마포 옷이었습니다. 그분이 내 얼굴을 들어 올리자, 나는 울며 여쭈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하느님은 여성을 사랑하시나요?”
이에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임금께서 당신의 닫힌 처소에 들고자 하신다는 소식을 받자, 땅으로 시선을 보내셨습니다. 당신을 빚으신 그 흙으로 시선을 보내시고, 즉시 ‘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성들은 하늘보다 땅을 바라보기에 보잘것없다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동정녀가 시선을 보내신 곳은 땅이었습니다. 만물이 온통 경련으로 떨고 있는 듯한 그 땅 위에, 그것을 지으신 분의 질서와 최상의 일치가 있습니다. 땅을 흠숭하는 이는, 전나무가 꿀을 내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수녀원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힐데가르트에게 푸른 자연이란 시야를 맑게 하고, 영혼의 몽롱함에서 내적 눈을 씻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한겨울이어서 푸른 이끼와 녹은 눈이 어우러져 비단 색실로 무늬를 짜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정경이었는데, 힐데가르트의 눈동자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촉촉하고 신선한 초록빛이었는데, 어떤 때는 시든 금빛이나 갈색이 되기도 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허리를 굽혀 약초를 찾아냈습니다. 손을 놀리지 않고는 생각을 못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약초 채집장까지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욕탕balnea 근처의 그리 크지 않는 으슥한 건물이었습니다. 발의 오래된 상처가 아물지 않아 온몸이 감염된 한 여성을 위해 안개 풀 우린 물을 준비하라 주문하셨습니다. 
며칠 사이에, 상처가 아마포 위에 놓인 뜨거운 잎사귀에 닿으면서 가장자리부터 차차 아물어가는 것을 나는 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내 안에 있던 상처, 맡은 바 직분을 해내지 못하여 모든 이를 실망시켰다는 그 부끄러움도 사라져 갔습니다. 옛 상처가 바람이 바뀔 때 콕콕 쑤시듯, 때로는 꿈에까지 나타나 몸부림치고 비틀거리며 내 상태를 폭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침 성무일도 후 자매들이 쉬러 들어갈 때, 재촉하여 산책을 나섰습니다.
하늘에는 들오리 떼가 비행의 의도를 안다는 듯 대열 방향을 바꾸었고, 나무들 역시 헐벗은 가지의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은 실개천에서 강이 되는 것을 기억시키며 흘렀습니다. 이런 것들이 내 상념이었으니, 창조의 한가운데에서 내게 정확한 직관력이 없던 까닭입니다. 어쨌거나 힐데가르트가 시킨 대로 땅을 디딘 발에 힘을 주며 걸었습니다. 발바닥은 넓고 부드럽게, 발가락은 쭉 펴고 편안하게 걷다 보면 내 발로부터 응답이 오리라 했습니다.
그즈음에 나는 받아쓰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이미 두 수사가 힐데가르트 곁에서 이 일을 했는데, 처음에는 고트프리트였고, 그가 죽자 빌베르트가 했었습니다. 나는 힐데가르트가 구술하는 대로 그분의 생애를 받아썼습니다.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 두 비서는 당신을 성녀로 기록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현시에서 참빛이 숨김없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성인이 되지 않으리라 하셨다 합니다. 친분 있는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침묵 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실 때, 그의 시선은 깊고 그윽하였습니다.
“여성들이 성덕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의 본성을 발견해 내야 하는 때가 앞으로 올 것입니다. 남성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나, 여성은 살과 피로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애초에 실물 모형처럼 벌거숭이였고, 그래서 여성에게 청하여 살과 피로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완벽했으니, 대大옹기장이의 의중에 있던 대로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할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몸을 잊으라 요구할 것이니, 몸에서 껍질의 곤혹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여성의 변용은 사물의 자연 질서에 속하지 않으며, 성인은 몸을 벗어날수록 그만큼 더 추앙될 것입니다. 거룩한 여성들은 영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것에 절제와 조화를 좋아하시니 영혼이 홀로 외로이 있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벌이 자기 꿀통 속에 들듯 몸에 들어가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절제보다는 과잉을, 절도보다는 짜릿함을 좋아하는 앞으로의 세대에서, 이러한 내 생각은 행운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일식日蝕처럼 가끔 나를 찾아오던 우울함이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던 것은 내가 성덕에서 멀다는 것, 안식처를 찾아 헤매건만 한 번도 고향에 있어 보지 못하는 망명자처럼 늘 밖에 있다는 느낌, 고아라는 느낌들이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깨닫기 시작했으니, 성녀가 되기보다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이 목표를 향하여 온 생애를 사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겸손한 서기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꼴이 잡혀 갔고, 그 모험담 속으로 나 자신도 빠져들면서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초를 입힌 목판에 표시해 둔 것을 예쁜 글씨체로 베껴 썼으며, 한 마디도 흘리지 않으려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마치 방향芳香 요법을 다루는 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수지樹脂 방울을 모으듯이 했습니다. 필사실의 침묵 속에서 나는 하얀 양피지를 단백석처럼 미끄러트렸고, 자를 들고 정확하게 선을 긋고, 잉크 자국을 내는 펜을 따라갔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생애가 나의 시간, 나의 하루하루에서 엮어져 갔습니다. 

주님의 해 1179년 9월 17일 아침, 그날에 이르도록 힐데가르트는 자리에 눕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노년기는 그의 몸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은 채, 아주 곱게 투명한 조직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자신의 생애가 끝나고 길게 뻗은 빛 사다리를 오를 순간이 온다고 판단하시자,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각자를 위해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늘 하던 대로, 나는 초 입힌 목판을 치마에 감싸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분이 미소 지으셨으니, 그분 원하시는 바를 내가 마음으로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늘 해 오신 작업을 아무도 중단시키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펜을 움직이면서 나는 기쁨으로 떨었으니, 쓰는 일이 힐데가르트의 그 마지막 삶을 따내는 숭고한 방법이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떠나가고 계셨습니다. 근원에, 아니 그 이상으로까지 오르시면서, 목숨은 심장 고동에 남겨 두고 침묵의 초원에 계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가까이 오라 하시더니 꼭 안아 주셨습니다. 부드러운 아마포 옷에 싸인 그분 냄새와 함께, 지기 전의 장미 향 같은 향내가 났습니다. 그 향은 그 방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는데, 지금도 내 가까이에서 풍겨오는 듯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사에는 다 때가 있으니, 철이 되면 크로커스가 움터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간델스하임에는 수녀원장이 필요합니다.”
그날은 가을답지 않게 5월의 향기가 넘치는 듯했습니다. 그분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방으로 침대를 옮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주위에 모여, 침묵 기도와 우리를 위해 작곡하신 그분의 노래를 번갈아 불렀습니다. 아무도 울지 않았습니다. 상실감에 빠지기보다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우리 방에 천사들과 모든 별이 총집합해 내려와 있는 듯 은혜로웠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어떤 빛이 방 안을 구석구석 채워 밝히더니 쌍무지개가 하늘빛 둥근 천장에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걸쳐 떴습니다. 그리고 맨 위에는 별 같은 십자가들이 무수히 반짝거렸고, 춤추는 오색 수레바퀴 안에 십자가 하나가 점점 커졌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우리를 떠나가셨습니다. 
나는 아이빙엔, 힐데가르트가 묻히신 그곳에 몇 달간 더 머물러야 했습니다. 환자, 절름발이, 광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아 통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천지 사방에서 몰려와 치유를 얻으려 그의 무덤에 손을 대거나 유물을 청했습니다. 밤에는 여기저기 작은 등불들이 깜박였고, 병원에 자리를 얻지 못한 순례객들은 소나 말의 입김을 맡으며 노숙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탄성을 질렀는데, 사지가 멀쩡해지고 두통이나 지겹던 우울증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입에서 유황 덩이 같은 괴상한 불꽃이 나오는 것을 보았으며, 드디어 평화를 찾았다고 외치는 이도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살아생전보다 더 살아 있었으니, 그분의 에너지가 둑을 뚫고 넘쳐 나서 모든 것을 진동케 하는 듯했습니다. 이 모든 소동은 마침내 고위 성직자들을 궁금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교황 사절과 함께 밀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사방에서 힐데가르트의 시성 탄원이 들렸고, 교황 사절은 모든 증빙 서류를 수집하며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나와 빌베르트는 수기들과 이미 엮어 묶은 복사본 책들을 모두 모아 정리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지도에 따라 만들어진 책 《길을 알아라Scivias》는 복사본 세밀화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자연학Physica》과 《원인과 치료Causae et Curae》도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그 책들 안에는 우주가 인간에게 위안과 치료법을 주는 그 법칙들에 관한 말씀과, 건강도 신심 실천이라는 견해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고트프리트와 장블루의 빌베르트와 내가 함께 쓴 《힐데가르트 생애》도 우리는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작업한 복사본 하나는 챙겨 두었습니다. 흘러내리는 촛농으로 필사실을 어지럽히면서, 양피지 페이지들을 채우느라고 여러 날, 여러 밤을 보냈던 그것입니다. 
교황 사절은 곧바로 내게 질문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구술하는 바를 충실히 베껴 썼느냐, 그분이 말하는 동안 그분은 정신이 온전했느냐, 환시에 빠져 있지는 않았느냐 누차 물으면서 내가 쓴 페이지들을 넘겼습니다. 사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기록물을 살피면서 가끔 애매하게 웃었으니, 계집아이들의 재잘거림 같은 이야기라는 듯했습니다. 그는 갈매기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서-하느님, 제가 이런 말하는 것을 용서하시기를!-절대로 사람은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의 모든 환시가 다 로마의 관심거리가 될 수는 없으리라는 야릇한 말을 던졌습니다. 거기서는 성인들이 시시한 강령술이나 하고 예쁜 계집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별로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아주 다른, 전혀 다른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를 모시고 온 마인츠의 고위 성직자 한 분은 술 부대처럼 뚱뚱했는데, 모든 게 잘되어 간다는 식으로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겼습니다. 힐데가르트의 것으로는 책 몇 권과 그분의 투니카, 나를 위로해 주던 그 감미로운 아마포 옷 두 벌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마인츠의 사제는 힐데가르트의 것은 모두 놓고 가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가면 내가 작게 조각을 내어 간델스하임에서 유물 장사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탉들이 울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발, 아무 고통도 없는 넓은 발바닥, 쭉 핀 발가락에만 집중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도착하면서 바라본 간델스하임의 산들은 먼저 보았을 때처럼 높고 빛나지 않았으며, 흩날리는 첫눈에 덮여 창백해 보였습니다. 간델스하임 벽에는 수녀원장을 계승한 내 이름이 다른 이들의 이름 밑으로 이미 새겨져 있었습니다. 왕가 순으로 하투모다, 게르베르가, 크리스티나, 로스비타, 류트가르디스, 빈델가르디스, 제2 게르베르가, 소피아였습니다. 
각자가 다른 이들 안에 있다는 생각을 나는 좋아합니다. 다른 여성에게서 탄생하여 나오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다소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나는 하루에 여러 번 《힐데가르트 생애》를 신탁처럼 읽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혼자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읽는다는 것 역시 일종의 탄생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간델스하임의 어떤 관습들이 거북했기 때문인데, 자매들은 너무 우울했고 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럴 때면 숨 막히는 절망이 나를 엄습했고, 너무 차갑고 썰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 나는 방 안에서, 루페르츠베르크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러 보았는데, 어색한 파반느 춤의 큰 걸음 동작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간델스하임은 너무 조용하고 너무 우울하고 궂은비만 계속 내리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새 둥지처럼 나쁜 생각들로만 가득 찼습니다.
힐데가르트는 당신 글로 내게 저항 의식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무력감이 침입해 오면 그 침입자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라 하시고, 모든 것을 좁은 바늘구멍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듯한 인내를 가지라 이르셨습니다. 나는 그분일 수 없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실현하셨던 그것은 몇 세기를 앞선 것으로, 아마 천 년 후에나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모습으로 빛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로마로 보낸 시성 절차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고 힐데가르트는 성인이 아니니, 당신이 예견하신 대로였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자연의 미묘한 이치들을 가르치던 그분의 저서들은 더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음악 역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시작하신 생기 있는 연결 고리 중 하나였습니다. 힐데가르트를 읽는 일, 《원인과 치료》로 자연을 연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보며, 그분에게서 저항 의식을 배우고, 창조계의 푸르름을 받아들이고, 춤추고, 어디서나 경축하는 일은 이제 내 딸들인 여러분의 몫입니다. 가장 큰 탈렌트는 어디서나 늘 기쁨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간델스하임의 수녀원장, 어머니요 자매인 나 아델라이디스가 사랑하는 딸들에게 남겨 주는 모든 것입니다. 

역자의 말

저는 지난해에 토리노 엘레디치 서점에서 발견하여 호기심에 사 들고 온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성인전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다니! 저자가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마 소설 형식이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저서인 《복녀와 성녀들: 중세의 뛰어난 여성들Sante e Beate: Figure femminili del medioevo》을 읽고, 교황님이 이 성녀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 9월부터 12월까지 17회에 걸쳐 수요 일반 알현 시간에 다루신 내용으로,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잔 다르크 성녀 등 열여섯 분을 조명하시면서 맨 처음으로, 더구나 유일하게 두 차례에 걸쳐 이 힐데가르트 성녀의 생애와 영성을 다루시던 것입니다. 또한 2012년 5월 10일에는 등가等價 시성을 하시고, 10월 7일에는 교회 학자 칭호도 부여하셨습니다(역자 부록 참조).
귀국 후 이 책을 번역하기로 한 저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듯이 번역도 놀이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힐데가르트의 언어는 우의적인 데다가 12세기의 이야기여서, 많은 분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어려워도 힐데가르트를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서문은 저자의 서문이 아니라, 스승의 전기를 구술한 힐데가르트의 애제자 수녀 아델라이디스의 것이며, 저자는 서문이 아닌 후기를 썼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주신 모든 분, 특히 힐데가르트 영성에 붙들린 김인숙 아녜스 자매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를 읽는 분들은 힐데가르트처럼 하느님, 사람, 교회, 전례, 음악, 자연, 풀 한 포기, 밤하늘의 별들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2013년 12월 21일 
제주 이시돌 노루 오는 집에서
임원지任元智, 체칠리아 수녀F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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