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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빛 -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교회와 시대의 징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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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페터 제발트 대담 및 정리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출간일
        2012-03-12
        역자
        정종휴
        판형/면수
        148*210/양장/348면
        예상출고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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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교황 대담집 출간!

          12억 가톨릭 신도의 수장이며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지성인 베네딕토 16세(본명: 요제프 라칭거). 그와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페터 제발트가 대담한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교황 대담집으로, 독일의 헤르더 출판사는 이를 “교회의 신기원”이라고 했다. 교황이 털어놓는 교회와 사회의 위기, 그 문제점에 대한 생각과 그동안 궁금했던 그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가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페터 제발트는 원래 반가톨릭적인 심층 기사를 써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교황이 추기경으로 있었을 당시 그를 비판할 목적으로 대담을 청했는데 그는 그 대담을 계기로 가톨릭교회로 회귀했다. 그 이후 꾸준히 교황과 인연을 맺어 왔고 이번에 교황에게 청한 대담이 성사된 것이다. 2005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265대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 세상의 높은 존경과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의 재위 5년여를 되돌아보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가톨릭 사제의 성 추문 사건은 사회적 충격과 함께 교황에게도 큰 고민을 안겨 줬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윌리엄슨에 대한 파문 철회는 유다인들과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또한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의 연설은 심각한 논쟁과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불러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외에도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과연 교황은 어떠한 이야기를 할까?

          권위의 옷을 벗고 세상을 꿰뚫어보다!

          ‘휴식을 바랐던 고령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이 된 순간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톨릭교회의 최고 목자가 된 뒤로 신앙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 ‘교황은 여가 시간에는 수단 대신 스웨터를 입기도 할까?’ ‘급여 통장은커녕 서류 가방 하나도 없다는데 사실일까?’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제1부 ‘시대의 징표들’에서는 위와 같은 교황 개인에 대한 소소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성 추문 사건과 상대주의 독재, 환경 파괴와 세속주의로 인한 지구 전체에 걸친 재앙 등에 대해 교황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낸다. 특히 성 추문에 대해 교황은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정화의 계기로 삼아, 사제들이 서로 살펴 주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면서, 신자들에게는 참빛이신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교황은 또한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동성애라든가 여성의 성직 서품을 허가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상대주의 독재’라고 칭하며 그것은 곧 교회 나름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파악한다. 환경 파괴와 세속주의로 인한 지구 전체의 재앙이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영혼의 숲부터 가꿔 나가야 하며, 미디어 문화와 상업 문화에서 비롯된 정신의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열정의 일꾼, 실수를 인정하다!

          제2부 ‘교황의 직무’에서 대담자는 진정한 교황의 모습에 대한 성찰,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한 노력,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과 이슬람과의 대화에 대한 성과와 방향, 회칙과 교서, 훈령에 대한 설명과 그 의미, 사목 방문에서 받은 인상들에 대한 교황의 입장을 끌어낸다. 그래서 특히 성 추문 피해자들을 방문하고 위로한 일, 세계 청년 대회에서 받은 감동, 유럽과 북미에서 언급되는 교회의 위기 속에서도 새롭게 일어나는 신심 운동, 아프리카 사목 방문에서는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교회의 노력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된다. 그리고 성 비오 10세회 소속 네 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 철회 사건과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윌리엄슨에 대한 사건 전말에 대해 들려준다. 교황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했기에 성 비오 10세회 주교에 대한 파문은 철회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도, 윌리엄슨의 경우는 철저한 사전 조사를 하지 못한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보편교회의 수장,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

          제3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는 우리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일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대답이다. 게임과 도박, 포르노 중독 같은 병, 효율성의 극대화만을 노리는 대기업, 그에 시달리는 노동자, 가족 관계의 상실로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대중매체, 과학만을 맹신하는 세태……. 우리의 가치와 척도는 방향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화임을 교황은 언급한다. 피임, 성체성사에 대한 배타성, 사제 독신제와 여성의 사제 서품, 동성애에 대한 입장과 교회의 쇄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모님의 메시지, 복음을 바탕으로 한 종말론과 최후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은 마무리된다.

          《세상의 빛》에서 신앙에서 솟아나는 희망을 만나다!

           또한 이 책 부록에는 교황의 발언(연설, 훈령)에 대한 원 자료들을 발췌, 요약해 실어 놓았다. 특히 2012년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교황 발언을 몇 가지 더 추가했으며, 교황의 약력과 활동도 연도별로 정리, 추가했다. 또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용어와 인물별 찾아보기도 넣었다. 많은 논쟁과 논란 속에서도 교황은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내뿜는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줄기 빛과 같다.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춰 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교황의 맑은 지성과 신앙의 눈으로 짚어 주기 때문이다. 회개와 반성, 자기 정화의 노력을 통해,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에게 희망과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해 주는 종합 선물 세트와 같은 이 책에서 권위의 옷을 벗고 진솔하게 들려주는 교황의 말은 우리에게 더욱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수많은 문제가 있고, 모두 다 해결되어야 하지만,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리고 이 세상에 하느님 모습이 새롭게 보이지 않으면 결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본문 중에서

          페터 // 2009년 성 비오 10세회 소속 네 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 철회가 최초의 균열이었습니다. 이 사건과 그 배후의 잘못된 배경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황님은 그 전까지 ‘베네딕토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높은 존경을 받으셨는데, 단숨에 ‘운 없는 교황’, ‘세상 절반의 화를 사는 사람’이 되고 마셨습니다. 논평들은 그야말로 참담했습니다.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은 유일무이한 반교황 미디어 캠페인에 직면하여 저널리스트들의 ‘공격적인 무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유다계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제는 ‘온갖 편견과 편파에 심지어 거짓 정보’가 난무한다고 했습니다. 그 파문 철회는 잘못된 일이었나요?

          교황 // 아무래도 파문 철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많이 퍼졌는데, 배웠다는 신학자도 갈피를 못 잡긴 마찬가지였거든요. 그 네 명의 주교들은 사람들의 추측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적인 행동 때문에 파문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위임 없이 주교품을 받았기 때문에 파문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적용된 관련 법규는 바로 옛 교회법에 의한 것입니다. 그 법에 따르면 교황의 위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교 서품을 하는 사람이나 서품된 사람은 파문을 당합니다. 즉 그들이 파문당한 것은 교황의 수위권에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주교들이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되었고, 교황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지요.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교가 된 사람이 교황의 일반적 수위권과 현재 직무를 수행 중인 교황의 수위권을 별도로 인정할 경우 그 파문은 철회됩니다. 그런 경우 더 이상 파문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경우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이를 통해 서서히 균열이 메워지길 바라면서요. 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경우에도 그와 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정리하면, 그들은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되었다는 이유로 파문당했으나 이제 교황을 인정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파문이 철회된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모든 점에 있어서 교황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요. 이 자체로 보면 정상적인 법적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 측 언론 홍보가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 싶네요. 이 주교들이 파문당한 이유며 순수한 법적 근거로만 보더라도 파문 철회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50~53쪽 ‘성 추문’)

          페터 //  진보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 기후 회의에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지구 상의 수많은 국가가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첫 모임을 가진 뒤 코펜하겐 정상 회의까지 오는 데 무려 17년이 걸렸습니다. 과학자나 환경 운동가와 정치가들은 코펜하겐 정상 회의를 일컬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의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회의는 유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촉탁을 받은 1,000명 이상의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는 지금부터 최대 2도 이상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이 될 경우 기후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바뀔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코펜하겐 협상 문서 초안의 내용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2도라는 한계를 넘어서리란 것은 이제 확실해 보입니다. 그 결과는 태풍, 홍수로 죽은 곡식이며 과일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기후 변화와 같은 위협을 인류가 함께 노력해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옳은 것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교황 //  이 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재앙에 대해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인식이 도처에 있습니다. 아울러 지구 전체 차원의 책임이라는 의식도 있습니다. 윤리를 더 이상 일정 집단이나 민족과 결부지어서는 안 되고, 지구와 모든 사람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사람은 확실히 도덕을 인식하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력을 정치 의지와 행위로 바꾸는 일은 자기 포기의 자세가 없어 다시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일은 국가살림으로 전환되고 결국에는 개개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다시 각각의 집단마다 서로 다른 부담이 문제가 됩니다. 이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인류 전체, 특히 개발과 진보의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고 심오한 도덕의식이나 인생의 가치관이 될 자기 포기에 대한 마음가짐 없이는 정치 의지도 결국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렇습니다. ‘모두가 긍정하고 찾는 위대한 도덕 의지가 어떻게 하면 개인의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정치가 무기력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러한 보편 의식이 개인의 의식 차원으로 파고들어 자리잡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겉보기에 거창한 행사만 여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가까이 있으면서 오직 양심에 호소하는 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볼 때 교회가 나서야만 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 큰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이 문제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가까이 있으며 그들이 일정 수준 도덕 의지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도덕의 근본이 되는 태도를 영혼에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75~78쪽 ‘지구 전체의 재앙’)

          페터 // 상대주의적으로 변화된 세상에서는 새로운 이교 문화가 갈수록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 말고도 교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마치 진공 같은 영역뿐만 아니라 반교회적인 세력까지도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어느 신문은 로마에 있는 교황은 오늘날 ‘이 나라에서 통하는 종교, 곧 ‘시민 종교’에 위배’된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전에 이탈리아 상원의장을 지냈던 마르셀로 페라가 분석한 것처럼 일종의 새로운 문화 투쟁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세속주의의 대규모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황 // 관용적이지 못한 분위기가 새롭게 확산 추세라는 것은 공공연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익숙해진 생각의 척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위 ‘바람직하지 않은 관용’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바람직하지 않은 관용 때문에 공공건물에 십자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지요. 그 바탕에 놓인 뜻을 본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아량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은 종교, 즉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이상 눈에 띄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가톨릭교회를 옥죄어 동성애라든가 여성의 성직 서품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바꾸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 나름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종교를 절대적인 척도로 만들어 누구나 다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 전해 온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유’로 보이겠지요. 그렇지만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결국은 새로운 종교의 편협한 요구로 이어집니다. 그 종교가 합리적이라서 보편타당하다고 사칭하면서, 또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모두에게 기준이 되어야만 할 공간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관용의 이름으로 관용을 철폐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이성이 이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적대적인 전체주의를 내세우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이 위험을 아주 단호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종교’만이 모든 걸 결정하고 전체 인류에게 의무가 되는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서도 안 됩니다.

          (85~87쪽 ‘상대주의의 독재’)

          페터 //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변혁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 생태, 사회 차원에서 말이지요. 학자들은 다음 10년이 지구의 생존에 결정적인 시기라고 봅니다. 교황님도 2010년 1월 로마 교황청에서 외교관들에게 “우리의 미래와 지구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라는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이런 위험을 전반적인 차원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무기력이나 혼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파티마에서 하셨던 강론에서는 거의 종말론에 가까운 어조로 “인간은 죽음과 공포의 순환을 일으킬 줄은 알게 됐으나 더 이상 끊을 수 없게 야기시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징표를 볼 때 세상을 바꾸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했다고 보시는지요?

          교황 //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기겁하게 하는 징표들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댈 수 있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징표들도 있습니다. 공포와 위험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이야기하였지요. 여기서 주교들의 방문으로 마음이 급하게 된, 한 가지만 덧붙일까 해요. 많은 수의 주교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주교들이 말하기를, 그곳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약 재배와 마약 거래가 있는 곳의 사정은 마치 사악한 괴물이 사람들을 타락시키기라도 한 것 같다고 합니다. 마약 거래와 마약 소비라는 뱀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지구를 휘어 감았습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며 세계를 폭력으로 몰아넣으면서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미래를 위태롭게 합니다. 이 역시 서방 세계가 책임져야 할 끔찍한 일에 속합니다. 서방 세계는 마약이 필요하자 마약을 공급할 나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 그곳 사람들을 소모시키고 파괴시키지요. 말하자면 이미 있는 행복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행복에 대한 굶주림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악마의 낙원이라고 할까요, 그런 데로 달아나서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청소년을 파괴하는 섹스 관광입니다. 주교들에 의하면 그 실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이랍니다. 교만과 권태, 서방 세계의 그릇된 자유에서 비롯된 엄청난 타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기쁨을 추구하고 극단적인 즐거움을 원하며 영원한 것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그것이 보장되지 않고 불가능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거짓된 것, 거짓된 무한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시급하게 맞서 도전해야 하는 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무한성은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또 몸소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이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잘못된 영향에 대적할 힘을 내고 악의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은 이들과 착한 사람들의 힘을 모두 모아야 합니다.

          (99~102쪽 ‘회개할 시기’)

          페터 // 24년 동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곁에 계셨으니 교황청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황으로서 감당할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충분히 깨달으시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요?

          교황 // 그 사실은 무척 빨리 깨달았습니다. 부제, 사제, 교수로도 커다란 책임을 짊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교회 전체에 대한 책임은 얼마나 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일을 혼자서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교황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며 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협조 속에서 일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당연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동료가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과 교황은 그저 함께하는 사람 중에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일 뿐 결코 절대군주로서 외로운 결단을 내리거나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 등입니다.

          (115~116쪽 ‘하베무스 파팜(새 교황 뽑히셨네!)’)

          페터 // 교황님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종교와 합리성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이 왜 함께 가야 하나요? 그냥 ‘오로지’ 믿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예수님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 // 보지 않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데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신앙을 내적인 통일성과 구약과의 연속성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을 온전히 설명하시면서 신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시며 역사가 증언하고 창조가 이야기하는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합리성이라는 것이 이미 구약에서 신앙의 기본 요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빌론 유배 시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창조주요, 하늘의 하느님이며 오로지 한 분뿐이신 하느님이시다.” 이로써 하느님의 보편성이 다름 아니라 그 합리성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 셈입니다. 이 핵심이 나중에 구약과 그리스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성향을 강조하던 바빌론 유배 시절과 대체로 같은 시기에 다신 사상을 넘어선, 유일신에 대해 묻는 그리스 철학도 성립하였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신앙과 이성, 이해 가능한 것의 범위를 넘어 내다보는 것과 동시에 합리적인 책임을 함께 연결하는 것이 교회의 큰 책임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26~127쪽 ‘하베무스 파팜(새 교황 뽑히셨네!)’)

          페터 // 2006년 9월 12일 교회와 무슬림 관계에 대해 언급한 ‘레겐스부르크 연설’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교황님은 비잔틴 황제와 페르시아 학자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에 관해 나눈 대화를 담은 어느 역사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 뒤로 이슬람 국가에서 교회 시설이 불길에 휩싸이고, 서방의 저널리스트들은 격노에 찬 논평을 썼습니다. 그 연설은 교황님 임기 최초의 실수로 분류됐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교황 // 그 연설은 학술적 개념을 목표로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황의 연설을 학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읽으리란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정치적 시각으로 보니 전체 연설의 씨줄과 날줄의 섬세한 짜임새는 보지 않고 그저 텍스트 하나를 잘라내서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자체로 볼 때 그런 의미가 아닌데 말이지요. 그 문구는 옛 문답에 나오는 어떤 장면에 관한 것인데, 제 생각에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관심을 끄는 문답이랍니다. 저는 마누엘 황제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는 당시 이미 오스만 제국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슬림을 공격할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지성적인 대화에서 활발한 질문을 제기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적 의사소통은 이러한 섬세한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일들이 지나고 나서 마침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줬습니다. 터키 방문 때 제가 이슬람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는 사실과 이슬람을 위대한 종교로 인정한다는 사실, 또한 서로 대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논란으로부터 긴밀한 대화의 싹이 튼 것이지요. 공개적인 대화로 두 가지 문제, 그러니까 폭력에 대한 관계와 이성에 대한 관계를 이슬람이 해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문제가 나름의 순서로 해명되어야 하고 또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로써 이슬람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내적 반성이 시작되어 그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출발점이 됐습니다.

          (154~156쪽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과 이슬람과의 대화’)

          페터 // 가톨릭교회의 성도덕 문제가 거센 반발을 샀는데요, 이는 뒤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교황님은 ‘신앙의 인간적 특성’에는 하느님이 만드신 육체에 대한 긍정도 포함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더 나은 성性을 위한 변론인가요?

          교황 // 인간의 육체적 특성은 성적인 것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합니다. 물론 성性이 육체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긴 하지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영혼이 있는 존재며 육신으로서의 사람이 그 자신이기 때문에 육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성을 긍정적인 선물로 이해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동참하기도 하잖아요. 이와 같이 긍정적인 해석을 찾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보물을 지켜 내는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 늘상 다시 도덕적 엄격함이 만연해 있고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성행했던 성에 대한 부정적 가치관이 교회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얀세니즘만 해도 그렇지요. 이 얀세니즘은 인간의 성격을 왜곡하고 불안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시기에 있었던 본래의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를 되찾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에 대한 긍정과 그 기쁨, 그러니까 성적인 것에 대한 긍정이지요. 이를 늘 원칙과 책임이 수반되는 선물로 봐야 하지요. 자유와 책임이 궤를 함께하는 것은 늘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기쁨이 자라며 제대로 된 긍정도 가능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적 인간상을 다시 긍정하면서 그 위대한 긍정의 정신 속에서 새롭게 꽃피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163~165쪽 ‘복음 선포’)

          페터 // 2009년 3월 교황님의 아프리카 순방과 함께 바티칸의 에이즈 정책이 새삼 미디어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에이즈 환자의 25퍼센트가 가톨릭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레소토와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그 비율이 40퍼센트가 훨씬 넘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교황님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만이 에이즈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길로 입증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사람 가운데는 교회의 평신도들도 많은데, 그들은 에이즈의 위험에 빠진 사람들에게 콘돔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비판합니다.

          교황 // 언론이 그 하나만을 부각시켰고 아프리카 순방의 다른 면모는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가톨릭교회가 에이즈 문제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효과도 없는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전 정말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는 다른 어느 기관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 왔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죠. 가톨릭교회야말로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예방과 교육 활동을 하고, 도와주고 충고를 하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또 교회야말로 그 누구보다 많은 에이즈 환자와 특히 에이즈를 앓는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치료 시설 가운데 한 곳을 방문하여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신문의 논단에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고통받는 곳의 형제자매를 돕기 때문이죠. 그 방문에서 저는 콘돔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문제를 콘돔을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그들이 병에 들기 전뿐만 아니라 병든 다음에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큰 말썽이 되고 말았지만 말예요. 실제로 사람들이 어디서든 얻으려고만 하면 콘돔을 구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요. 더 많은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사이 세속에서도 이른바 ABC 이론이라는 것이 개발되었습니다. ‘절제Abstinence-성실Be faithful-콘돔Condom’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서 콘돔은 다른 두 가지를 지키지 않았을 때 쓰게 되는 최후의 방법을 의미합니다. 즉 그저 콘돔에만 매달리는 것은 성의 문제를 통속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고 바로 이 점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성을 사랑의 표현을 보지 않고 그저 즐기는 마약과 같은 것으로 보도록 만든 위험한 원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통속화를 막는 싸움도 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인간의 존재 안에서 성의 긍정적 효과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의 일부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남창男娼이 콘돔을 쓰는 것은 도덕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지요. 모든 것이 다 허용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인식하기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이즈 감염이라는 악을 이기기 위한 근본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에 있습니다.

          (185~187쪽 ‘사목 방문’)

          페터 // 교황님 임기의 5년을 돌아보지요. 지금까지 임기 중간 결산을 한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이룩하신 것은 무엇이며, 특별히 성공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교황 // 해외 방문은 여러 문화와 중요한 만남이 됐고 그 효력은 계속됩니다. 보여 주기 위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그곳 주교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출발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그 대륙에서 해야 할 일을 시작했고 그 일들은 이제 그곳 교구들의 프로그램이 됐습니다. 마약 중독자 재활 치료 시설인 ‘희망의 농장’ 방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시설을 운영하는 한스 슈타펠 신부는 지금 도처에 설립되고 있는 그 시설의 지부에 관해서 전 세계로부터 오는 문의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디를 가든 가톨릭교회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포르투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 또한 폴란드 방문을 통해서도 이런 생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또 기쁨의 활력이 모든 이에게 전달되는 듯한 아프리카 방문도 좋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바로 교회 자신을 만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주님 앞에서 자각하고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디를 가든 이 점을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말한 사목 방문이나 또 다른 사목 방문들이 지금까지의 임기를 이어 오면서 얻은 결실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바오로의 해와 사제의 해를 보낸 것입니다. 이 두 해는 신앙의 근본이 되는 빛이 새로 빛나고 공동의 묵상이 이루어진 때입니다. 감동적인 증인들과의 중요한 만남으로는 두 차례의 주교 시노드가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시노드가 그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길었던 추문의 시기와 교회가 입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도 정화의 계기가 되고 결국 긍정적인 요소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199~291쪽 ‘윌리엄슨 사건’)

          페터 //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이라며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인가요?

          교황 //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 뵐 준비가 되면 본질적인 것, 즉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실제로 오시어 우리가 진리를 접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문이 열리도록, 우리가 진정한 생명, 즉 더 이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참생명을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279~280쪽 ‘최후의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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