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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보다 앞서 가신다
킬리만자로에서 피어난 그리스도교
    • 품목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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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빈센트 J. 도노반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출간일
        2012-06-28
        역자
        김혜경 감수 | 황애경
        판형/면수
        148*210/반양장/384면
        예상출고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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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세설명
        • 선교신학 분야에서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선교사와 신학생들의 필독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선교 현장에서 체현된 모범적 사례

          《선교사보다 앞서 가신다!》는 오로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직접 아프리카 마사이족 마을을 찾아간 한 사제의 선교 체험담을 바탕으로 선교에 대한 성찰과 고찰을 심도 있게 담아 낸, 선교신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각 민족과 토양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생생하게 체현된 모범적 사례의 책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고 하겠다.
          이 책에 대해 라민 사네 교수(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는 “그리스도교가 서구의 종교라는 오해를 벗고 진정한 세계 종교로 거듭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상당히 깊은 감수성으로 복음의 토착화 사례를 탐구했다.”라고 평가했다. 유진 힐먼 신부(성령회) 역시 “토착화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 주는” 책이라고 했으며, 김혜경 박사(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얼마나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지, 그리스도교가 지역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재발견될 수 있는지”를 숙고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평했다.


          100년의 선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열린 마음으로 떠나는 그리스도교 발견 여행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자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지만, 현대인에게 선교는 그리 인기 있는 주제가 못 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이 그리스도에 관해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썩 내키지 않는 과제가 되었다. 이는 역사 안에서 선교가 많은 오해와 의혹에 싸여 왔고 민족들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폭력과 편협함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당신이 선교사이고 선교 정책의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계의 4분의 3 이상인 이교도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교와 이교도의 관습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린 마음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경험에 기반하지 않는 이론과 신학은 헛된 말이며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저자는 복음 그 자체가 힘과 풍요, 창조성과 자유로 가득 찬 메시지임을 확신한다. 100년간 이루어진 동아프리카 선교의 흐름과 이에 대한 문제를 분석한 저자는 아프리카에서는 선교 자체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선교와 선교 활동의 의미와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마사이 마을을 찾아 떠난다.

          나는 그들이 구원 밖에 있다고 믿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선하고 거룩한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아프리카나 유럽 혹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길 잃은 사람들이 아니듯, 마사이족들도 길 잃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이며, 그들의 삶을 통해 이 사랑의 표징이 드러난다. 우리에게 구원이 가능하듯 그들에게도 구원이 가능하다.
           

          사자는 하느님이다. 선교사보다 앞서 가시는 하느님!
          마사이족 복음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

          도노반 신부는 선교 센터를 나와 마사이 마을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 마사이 부족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특징, 그들의 관습 등을 세세하게 알게 된 그는 잔인하고 고집불통이라고 여겼던 마사이족에게서 심오한 인간애뿐만 아니라 깊게 내재된 종교적 성향을 발견한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특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은 모든 부족과 민족의 하느님임을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가 하느님을 지엽적인 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용서에 대한 이해가 적은 마사이족에게 죄보다는 용서를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저자는 낙담하며 신앙에 대한 의심을 품고 고뇌한다. 그때 마사이 원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믿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사자가 사냥감을 쫓듯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신앙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늘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람이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자가 사냥감을 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자의 코와 눈과 귀가 먹이를 발견하고, 다리는 그 사냥감을 잡기 위해 속력을 낸다. 온 힘을 다해 처절한 죽음의 도약을 하고, 앞발로 그 목을 단번에 내리쳐 죽인다. 사냥감이 무너져 내릴 때, 사자는 팔(아프리카인들은 동물의 앞다리를 팔이라고 표현한다)로 그 먹이를 감싸고 끌어당겨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사자의 사냥법이다. 이것이 인간이 믿는 방법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부님, 우리가 신부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부님이 여기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신부님이 우리를 찾아내셨습니다. 고향을 떠나 우리를 따라서 숲으로, 평원으로, 가축이 있는 초원으로, 우리가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언덕으로, 우리 마을로,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지고하신 하느님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그분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심지어 우리의 땅과 민족을 떠나 그분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이 찾아다니다가 우리를 찾아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신앙의 현주소를 비춰 주는 거울,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는 안내서!

          도노반 신부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마사이족 선교 체험을 바탕으로, 바오로 사도의 전도 형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한 새롭고 젊은 교회, 개별 교회로서의 그리스도교의 미래상을 제시한다.
          선교사는 하루라도 필요 이상으로 머물지 말아야 하며, 성전이나 교회 건물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살아 있는 성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선교사와 사제의 역할이 구분되어야 하고 사제의 중요성이 권위가 아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언급한다. 특히 선교사는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여 복음이 뿌리 내리도록 그 민족에게 맡겨야 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선교 활동을 마치고 아프리카를 떠나는 심정과 자신의 선교 활동에 대한 결론을 친절하게 요약, 정리해서 들려준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바오로 사도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태초에서부터 숨겨져 온 비밀, 즉 기쁜 소식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문화들에 알려 준다는 것은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친절하심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그것을 심는 사람이 누구든, 거기에 물을 주는 사람이 누구든 그것을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이사 52,7)

           

          본문 중에서

          오늘날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선교 활동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를 가늠하는 핵심 기준은 성경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가? 복음적인가? 성경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또 해야 한다. 특정 가치와 더불어 우리의 선교적인 노력이 이 기준과 합치되게 할 수는 없을까? 선교 노력은 필요한 모든 조직과 구조와 함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펼쳐 가는 데 수반되는 온갖 발전과 기본적인 주요 개념이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를테면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선교를 성경적으로 조명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선교는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 74쪽 ‘침묵할 때와 생각할 때’

          나는 많은 관찰과 탐험 끝에, 그 지역을 스물여섯 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선교 센터에서 나와 차나 막사에서 지낸다면 매일 한 구역씩 방문할 수 있을 터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 구역을 1년간 방문해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1년에 여섯 개 구역 밖에는 방문할 수가 없다. 그러면 스물여섯 구역으로 된 롤리온도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는 5년이 걸린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보다 적게 걸릴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며 큰 의미를 띤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소임을 완수하는 5년 뒤에는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터였다.
          - 81~82쪽 ‘침묵할 때와 생각할 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방대하고, 무한하고, 불가능하고, 정복할 수 없고, 끝날 수 없는 과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오로는 자신의 일을 완수하고 나서 할 일이 남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도 한 지역에서 활동을 완수할 수 있고 또 완수해야 한다. 내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에는 세계 교회의 실제 상황과 관련된 것도 있고, 선교 인력 및 재정의 분배와 관련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일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도 있다. 선교사들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 사이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정치와 역사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선교의 막다른 시점에 도달해 있다고 하겠다.
          - 83쪽 ‘침묵할 때와 생각할 때’

          나는 미국에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본당들을 많이 방문했었다. 나는 그들이 기도하는 신은 한 부족의 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사이족과 함께 지내고 난 뒤에, 나는 그 신을 훨씬 쉽게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착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깨끗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나쁜 사람, 게으른 사람, 더러운 사람, 도둑질하는 사람, 직업도 없이 복지 제도에 의존하는 사람을 벌하는, ‘저기 저 밖에 어둡고 악한 사람들’을 벌하는 하느님은 어떤 신인가?
          - 94쪽 ‘말할 때와 행동할 때’

          마사이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 지방 특유의 고질적인 가축 절도가 암살과 살인, 살상 무기의 매매, 사업을 하면서 사기를 치거나 광고를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구원과 더 먼 일인가?
          마사이족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복음,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현재의 모습을 지닌 전 인류를 위한 것이고, 그 인류의 모든 종족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준비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 110~111쪽 ‘말할 때와 행동할 때’

          나는 문자를 모르는 마사이족에게 기억 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전해 주고, 예수님 말씀과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라고 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예수님에 대해 들은 것을 자기네 나름대로 말하고 토론했다. 앞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모여서 저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를 기억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공동체로서 그 일을 마치게 되면, 그들 나름의 복음과 성경 봉독과 말씀 전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기억력이 뛰어나다.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기억력은 희미해진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때가 곧 글로 쓰인 성경이 도입되기에 아주 적절한 때가 될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담은 걸어 다니는 보고와 그분의 삶을 증거할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글로 적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지속적인 도전 의식을 지닌 복음사가들이 등장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한 번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무엇을 전해 주겠는가?
          나는 내가 해야 하는 바, 내 앞에 앉아 있는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다. 나는 그 씨앗을 마사이 문화에 심어 주고, 알아서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 145~146쪽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교사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했다면 그는 할 일을 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은 그 메시지를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들이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인 뒤에 할 일이 성경에 적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쁜 소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쁜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 154쪽 ‘응답’

          나는 모인 공동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앉아 계신 연세 드신 분들은 교리 교육에 많이 빠졌습니다. 소 떼를 모느라 항상 밖에 나가 계셨지요. 이 어르신들은 세례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쪽 편에 있는 두 분은 교리 교육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우리말을 정말 잘 이해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이 젊은 어머니도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남성분은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 여성분은 복음 메시지를 거의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전사는 충분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당고야는 정중히 내 말을 끊은 뒤 단호하게 말했다. “신부님, 왜 우리를 갈라놓고 분리시키려고 하십니까? 신부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동안, 우리는 신부님이 안 계실 때 밤에 불을 피워 놓고 이런 점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공동체 안에는 게으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공동체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똑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마을에는 신앙이 부족한 사람도 있지만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게으른 사람들과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쫓으시렵니까? 첫날부터 저는 이 사람들을 대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사람들을 대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우리는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은당고야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때로 제 머리가 돌 같아서 배우는 게 늦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셨죠? 물론 그렇습니다. 이 공동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 170~172쪽 ‘응답’

          그들은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부님이 우리 이마에 물을 부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 우리 스스로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언제든지 신부님을 통해 성체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성찬의 백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 그들이 내가 없이도 성찬을 거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터였다.
          그들은 확실히 옳았다. 나는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었다. 공동체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찬 예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몇 년간의 신학교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단 하나의 문화, 그 사고에 뿌리박고 있는 교회의 역사였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빵을 함께 나누기 전에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
          - 218~219쪽 ‘웃을 때와 울 때’

          선교사는 자신의 뿌리, 부족, 혈통, 고향, 배경, 문화로부터 단절된 사회적 순교자다. 그는 낯선 땅에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걸어가도록 운명지어졌다. 그는 최대한 발가벗겨져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간다.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존재를 틀에 박힌 어떤 분이 아니라 종의 형상을 취하고 당신 자신을 비우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다고. 그분은 당신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당신 영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발가벗겨지셨다고. 그것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의 참된 의미다. 이러한 영적 빈곤이야말로 선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으로서, 자기 문화를 버리고 세상의 문화들에 대해 복음의 발가벗겨진 도구가 될 것을 요청받는다.
          - 330쪽 ‘변화의 바람’

          선교지에 도착한 첫날 내게 인사했던 바로 그 광경, 곧 6천 미터 높이의 킬리만자로의 꼭대기였다. 내가 그것을 처음 본 날로부터 17년이 지났고, 이제 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아프리카 대륙을 헤매며 원정 여행을 17년 동안 한 나는 적도에 있는 이 엄청난 설산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막사 바깥에서 그 산을 여러 번 보았다. 마사이 습지를 가로질러 16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석양 속에서 갑작스레 보이는 분홍빛을 띤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을 보면, 죽어 가는 사냥꾼이 최후의 착란 상태에서 만족스럽게 말한다. “아하! 저곳을 향해 내가 가고 있구나.”
          그 산은 내가 떠나온 곳이다. 나는 그곳을 내려다보면서 그 아래에서 나와 관계했던 모든 일들이 작지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산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면서, 내가 성경에서 선교사들에 대해 발견한 한마디 말씀이 생각났다. 저자마다 조금씩 강조하는 바는 다르지만 그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오다.”(나훔 2,1)
          - 335~336쪽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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